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 동인도 회사 (문단 편집) === 항로의 개척 === 아무래도 항로 개척 경험이 없다 보니 회사 성립 초기에는 항로를 개척하는 것에 주력하였다. 1601년 2월 13일 출발한 1차 선단은 총 4척으로 선원의 20%가 [[괴혈병]] 등으로 죽는 고난 속에 1602년 6월 5일 [[수마트라 섬]] 최북단 [[아체]]에 도달했다. 이후 [[자바 섬]] 반탐에 상관을 개설하고 각지에서 [[후추]]를 싹쓸이한 후 귀국했다. 그러나 후추를 만선으로 싣고 돌아오니 [[지금 향신료가 대폭락이야|'''후추를 너무 많이 사와서 후추값이 대폭락'''하는 사태]]에 첫 항해다보니 경비 지출이 컸고, 귀국 과정에서 다시 선원의 20%가 죽어 출발시 선원 478명 중 생존자가 278명밖에 남지 않는 등 이만저만 타격이 아니었다. 덕분에 출자자들에게는 현금 배당을 못 하고 후추를 현물배당해야 했다. 1604년 3월 25일 출발한 2차 선단은 1차 선단에서 얻은 교훈으로, '''"싸구려 후추 말고 비싼 [[정향]]과 [[육두구]]를 사야지!"'''란 목적으로 [[암보이나]]로 향했다. 그러나 암보이나는 한발 앞서 도착한 [[네덜란드 동인도 회사]]가 이미 접수해서 거래를 거부하여 상관 개설에 실패하고 대신 몰루카 제도 각지를 전전하며 정향과 육두구를 모아서 귀국했다. 수익 자체는 1차 선단에 비하면 높았지만 상관 개설에 실패하여 회사의 미래에 먹구름이 낀 상태였다. 이미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경쟁에서 크게 뒤쳐진 것이다. 1607년 4월 출발한 3차 선단은 [[동남아]]와의 향신료 무역을 일시 단념하고 인도와의 무역을 시도하여 [[1608년]]에 소코트라 섬과 인도에 각각 도달하고, [[무굴 제국]]의 [[술탄]]을 알현하였지만 인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[[포르투갈]] 상인들의 방해로 상관 개설에는 실패하고 말았다. 이후 4~10차에 걸친 항해동안 회사는 인도 마술리파탐에 상관을 개설하고 서부 해안에선 대규모 해적활동으로 상관개설에 비협조적인 지역 토후들을 위협하였으며 [[1612년]]에 [[태국]]에도 상관을 개설하고 [[1613년]]에는 [[일본]]에 도착하여 [[에도 막부]]의 [[쇼군]]을 접견하였다. 그러나 태국의 상관은 적자를 보고서 문을 닫았고(...), 일본과의 거래는 네덜란드 회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.[* 네덜란드는 전국시대 시기부터 먼저 일본과 교류를 하고 있어 난학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문명을 전파하고 있었다.] 이후 회사는 포르투갈 세력과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충돌을 시작했다. [[1614년]] 수라트에서 회사는 포르투갈 인도양 현지 함대의 공격을 격퇴하여 인도양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이후 무굴 선박들을 보이는 족족 나포, 격침시키며 [[무굴 제국]]을 압박했다. 육상에서는 강력한 대제국이었으나 바다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한 무굴 제국은 이에 [[1624년]] 회사에 상업특권을 부여하였고, [[1627년]]에는 황위 계승경쟁에서 잉글랜드 회사가 뇌물을 준 왕자가 승리하니 그가 바로 [[샤 자한]]이다. 이후 그는 회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